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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풀 다이어리

이렇게 디지털 노마드 프리랜서가 되었고, 일을 했습니다.(2부, 호주워킹홀리데이를 떠나다)

by marongmarong 2020.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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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3년 차, 열정만 가지고는 잘 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노력한다고 해도 늘 잘되지만은 않았습니다. 저의 주 타겟층은 스타트업이었는데, 이유는 제가 스타트업이라서 누구보다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대표님들의 마음을 잘 알 거라고 생각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 많은 브랜딩과 스타트업 관련된 서적을 많이 읽고 동영상을 보고 공부를 했던 터라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은 꽤 안다고 생각을 했기에, 제가 아는 정보 안에서 고객들이 모르고 또 필요로 하는 정보가 있으면 저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함께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지역마다 차이는 물론 있을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스타트업들이 여유 있게 창업을 시작하는 편은 아니기 때문에 그분들은 최소한의 예산으로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어야 했고, 자신들이 가진 돈을 쓰기 위해서는 신중하게 여러 곳을 알아보고 비교를 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기에 저는 그 분들을 위해 퀄리티는 높으면서 가격은 저렴한 서비스를 내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저렴하게 할 수는 없는지 물어보시는 분들은 많았고, 한 명의 고객도 아쉬웠던 (그리고 제 스스로 용역에 대한 가치관과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 흔들렸던) 저는 거절을 못한 채 이런저런 고객님의 요구를 대부분 다 받아들였습니다. 제 수고에 대한 부분은 제 스스로 배제한 채로요. 결과는 어땠냐고요? 좋진 않았습니다. "저기는 서비스로 해주던데 여기는 왜 안 해줘요? 저기는 더 싸던데.."라고 말하는 고객이 늘어나고, 일도 더 늘어났으나 수익과 보람은 그 노력에 비해 떨어졌습니다. 시간에 대한 여유가 없으니 스스로 발전해야겠다는 의지도 마음의 여유도 사라져 갔습니다. 저도 모르게 제 스스로 좋아하는 이 일의 시장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기도 했었죠. 결국 몸도 멘털도 점점 무너져 갔습니다. 제가 간과했던 아주 큰 부분에 대한 대가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대기업이 아닌 이상 가격경쟁 가지고는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노력 한다한들 제 스스로 명확하게 세우지 못한 용역의 가치와 기준을 고객들이 제대로 알아주진 않는다는 것을 말이죠. 그렇게 일을 해가면서 제 일에 대해서 스스로 회의감이 왔습니다. "이게..... 정말 내가 원하는 길이 었을까?" 

 

내 나이 30살,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나다.

 

빅토리아(Victoria) 주에 있던 열두사도 바위(Twelve Apostles)

    만나고 있던 미국인 남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한국에 5년 정도 거주를 했었고, 한국에 한 초등학교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5년 동안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 일은 오래 한다고 해도 수익이 더 올라가는 구조도 아니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많은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고민을 들어주고 많은 조언도 많이 해주었죠. 그러다가 한 날은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제안을 했습니다. 일로 인해서 함께 하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30대가 되면 앞으로 더욱 바빠질 텐데 이번 기회에 '우리'를 위한 긴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떻겠냐고요. 한 한 달 동안 고민을 했었던 것 같아요. 비록 몸도 마음도 고생을 하고 있어도 내 손으로 시작해서 3년 동안 버텨온 사업인데 쉽게 그만두기엔 미련이 남았고, 또 제 나이 30세(만으로 29세), 우리가 함께 워킹홀리데이를 갈 수 있는 것도 이번 기회가 아니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랜 고민 끝에 나는 스토어팜(지금의 스마트 스토어)을 닫지 않고 워킹홀리데이를 가기로 했습니다. 정말 간당간당하게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얻고는 2달 동안 오피스텔을 정리하고, 사업장의 주소는 가족의 도움을 받아 변경을 하였습니다. 오프라인 미팅을 종종 갖던 단골 고객에게는 호주로 이동하기 때문에 온라인으로만 일을 한다고 이야기를 드리고, 온라인으로만 주문을 하시던 분들께는 별도로 연락드리지 않고 비행기 타고 이동하는 시간을 생각하여 며칠의 휴무일과 공지를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혹시나 전화 연락이 올 수도 있기 때문에 연락처도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번호를 변경을 하였고 전화가 오면 가족들이 받고 카카오톡으로 알려 주는 방향으로 변경을 하였습니다. 호주에서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우선 큰 프로젝트를 받기는 힘들 듯하여 스마트 스토어에서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서비스 메뉴만을 남겨둔 채 대부분 내렸습니다. 내가 작업을 위해 필수로 챙겼던 것은 당시 내가 가지고 있었던 레버노 노트북(프리랜서를 시작할 때쯤 저렴하고 가성비 좋게 구입했던 노트북)과 컬러칩, 미러리스 카메라, 32절지 스케치북, 42색 색연필 외 몇 개의 필기도구였습니다.  

 

 

여행을 다니며 찍었던 사진. 남자친구(지금의 남편)과 나.

 

 

호주 멜버른에 도착하고 다음 날 바로 휴대폰을 개통시켰습니다. 데이터가 조금 넉넉한 것을 구입하여 수시로 주문이 들어오면 이메일 알림을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네이버 톡톡은 앱만 있으면 카카오톡과 같이 실시간 알람이 들어오기 때문에 고객 응대하는 데는 있어서 문제가 없었습니다. 간단한 서비스 상품 메뉴 이외엔 내렸다 보니 사실 문의도 이전보다 현저히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한 동안 계속 돌아다니면서 여행을 할 목적이었고 큰 수익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었기에 마음이 바쁘진 않았습니다. 여행을 하다가도 문의가 들어오면 카카오톡, 네이버 톡톡으로 응대를 하고 주문이 들어오면 낮에는 여행을 저녁에는 에어비엔비에서 무료 와이파이를 이용하여 컴퓨터로 작업을 하였습니다. 2주 정도 되어 남자 친구는 무거운 짐들을 가지고 이동하는 데에 불편함이 없도록 저렴한 중고차를 구입을 했고, 그 뒤 우리는 꼭 필요한 캠핑 용품들을 구입하여 차에 실어 본격적으로 멜버른 도시를 벗어나 장거리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저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캠핑장에서 숙박을 할 때도 있었고, 에어비엔비를 잡아 거기서 숙박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보통 에어비엔비를 이용하면 무료 와이파이가 있어서 일을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캠핑장에서는 무료 와이파이를 찾기가 힘들기 때문에 장거리 여행 때 필수인 것은 넉넉한 (인터넷) 데이터입니다. 당시 호주의 데이터 요금은 비쌌기에 최소한으로 아껴서 사용을 해야 했죠. 그래서 남자 친구는 운전 시 내비게이션과 뉴스, 일자리 알아보기를 위해 사용하였고, 저는 대부분 고객 문의 응대나 디자인 작업 의뢰가 들어오면 컴퓨터로 모든 작업을 마치고 고객에게 전송을 하기 위해 휴대폰 (인터넷) 데이터를 노트북으로 공유하여(테더링) 사용하거나 블로그(당시에는 티스토리가 아닌 블록체인 블로그 '스티밋(steemit)'을 이용) 사용하였습니다. 데이터가 부족하면 근처에 무료 와이파이존을 찾아가서 그곳에서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3개월을 빅토리아(Victoria) 주를 시작으로 남호주(South Australia)를 거쳐 퀸즐랜드(Qeensland) 주를 곳곳을 여행하였습니다. 

 

 

캠핑장에서 만난 야생동물들. 밥먹을 준비를 하려고 하니 신기하게도 여기저기서 동물 친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골드코스트에서 한동안 지내다가 여행한지 3개월이 우리는 서서히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었고, 함께 할 수 있는 농장일을 주로 찾았습니다. 그동안에도 여러 구직 사이트에 저희의 이력서를 올렸는데. 그러다가 오프라인으로 직접 찾아다니기 위해 농장 혹은 공장일이 많다고 알려진 번다버그 지역에 직접 차를 다고 가서 공장과 농장에 찾아가 일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하지만 일자리 중개회사들이 이미 다  연결되어 있던 상태여서 저희가 직접 가더라도 일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근처에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일자리 중개도 하고 숙박시설도 제공하는 곳이 있어 둘러봤는데... 수수료도 클뿐더러 숙박하는 건물 또한 온통 회색 콘크리트로 둘러싸여 감옥 같았습니다.  또한 중개업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올린 구인 정보와 남자 친구가 알아본 영문 구인정보를 비교해보면 저희가 찾았던 한국인이 올린 정보의 대부분의 일당이 많이 적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로 올린 정보는 거르고 오로지 영문으로만 된 구인 정보로만 알아보고 연락을 했습니다. 또한 계속해서 이력서를 여러 군데 올렸죠. 한 주가 지나자 검트리(https://www.gumtree.com.au)에서 2~3군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중에 마지막에 전화 온 곳이 저희가 있었던 곳과는 거리가 좀 있기도 했고 집안에 무료 와이파이는 없었지만 급여와 숙박비용 조건이 너무 좋아서 저희는 그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투굴라와(Toogoolawah) 마을에서 마음의 여유를 찾다.

그곳은 번다버그에서 4시간가량 가야 하는 투굴라와(Toogoolawah)라는 작은 마을에 있었습니다. 한가족 이서 운영하는 작은 오가닉 농장이었고 일하는 사람도 우리 밖에 없어서 시간도 원하는 시간에 저희가 벌고 싶은 만큼 일할 수가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필요한 작물은 마음껏 가져다 먹어도 되었었죠. 지금 생각하면 웃긴 게,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남자 친구와 저는 혹시 거기에서 일을 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라는 걱정도 했었습니다. 저희가 알아봤던 일자리 중에서 조건이 너무 괜찮았기 때문이죠. 걱정과 다르게 거기에 도착했을 땐 40대 후반에서 50대쯤 보이는 부부와 초등학생 남자아이 두 명, 내 년이면 초등학생이 여자 아이 한 명이 푸근한 미소를 보이며 서 있었습니다. 저희가 거주할 곳은 1인당 하루 만원 꼴 하는 창고 같고 시멘트 바닥으로 된 집이었습니다. 허름했지만 작은 방 3개에 거실 겸 부엌 실외 화장실이 있었고 이전에 많은 백패커들이 지냈다 갔던 곳이어서 백패커들이 구입해서 쓰다가 남기고 간 물건들도 많아 웬만한 건 다 있었습니다. 오븐, 에어 프라이기, 수제 맥주 제조기 등 없는 게 없었죠. (투굴라와에서 지낸 이야기는 너무 재밌던 기억이 많아서 따로 포스팅을 한번 하려고 합니다.) 아무튼 저희는 거기서 농장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농장일은 처음이고 그때 한창 40도까지 올라가는 여름이었어서 요령 없이 일을 했다가 초반엔 근육통에 탈진까지 왔었습니다. 하지만 일주일쯤 되니 모든 것이 적응이 되더군요. 명화에서만 볼 수 있을 법한 새파란 하늘과 하얗고 큰 뭉게구름들. 애완동물 샵에서만 볼 수 있을법한 알록달록 색색의 앵무새들은 머리 위로 떼를 지어 날아다녔고. 농장 근처에서는 각종 야생동물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귀여운 붉은여우, 큰 구렁이, 토끼, 노을이 질 때면 저 멀리서 뛰어가는 캥거루를 볼 수 있는 곳. 밤이 되면 집 밖으로는 엄청 어두웠지만 고개를 들면 별과 은하수가 쏟아지는 곳. 이 곳은 저희에게 지상낙원이었습니다.

 

지상낙원에서 살면서 경제적으로도 마음으로도 안정이 되자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곳에서 지내면서 저는 제 시간과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의 가치를  알게 되었고, 기본적으로 농장에서 기본적인 소득도 있었기에 제 감정과 시간을 낭비하면서까지 무리하게 진행해야 하는 프로젝트 의뢰가 들어오면 거절을 했습니다. 고객의 수는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제 일에 대한 가치를 알아주는 고객님을 알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한 예로 프리랜서 활동을 하면서 종종 협업하여 같이 일을 했던 프로그래머 분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카카오톡으로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리고는 애플리케이션 디자인에 대해서 의뢰를 요청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제시간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되면서 용역에 대한 비용이 올라가 있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드리자 서로 생각했던 용역에 대한 예산이 달랐기에 계약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몇 달 후 그분은 다시 연락이 와서는 제가 요청한 비용으로 작업을 함께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왜 다시 저한테 연락을 하셨는지에 대한 이유를 물어보니 몇 번 저렴한 비용으로 다른 분께 디자인 프로젝트를 맡겼었는데, 퀄리티도 별로였고 책임감도 없이 프로젝트를 어정쩡하게 끝냈다는 것이었습니다. 차라리 비용을 더 들이고 하더라도 자신의 일처럼 퀄리티 있게 끝까지 책임지고 작업해줄 사람이랑 함께 일하는 게 낫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에 기분이 정말 좋았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디자인이 필요할 때면 저에게 연락을 주셨습니다. 잘 끝낸 프로젝트는 또 다른 프로젝트를 불렀고, 이렇게 저를 믿고 일을 주시는 분들과 일을 하면서 수입과 능률 그리고 보람을 키워갔습니다. 또한 일러스트레이터에 대한 꿈이 있었지만 대학 졸업을 이후로 제대로 그림을 그려본 적이 그렇게 많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농장일을 마친 이후에 디자인 일도 없고 저만의 시간이 생기면 조금씩 그림을 그렸습니다. 투굴라와를 오기 전에 저는 남자 친구로부터 생일선물로 아이패드와 애플 펜을 선물 받았었는데요, (프리랜서 생활을 하면서 늘 가지고 싶었지만 제가 경제적으로 크게 여유가 없었기에 손그림만 그리고 늘 온라인으로 가격이 떨어질 때까지 윈도쇼핑만 했었는데 남자 친구가 그걸 기억하고 사주더라고요.) 그 소중한 아이패드로 저는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들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호주에서 아이패드로 그렸던 산타 시리즈 일러스트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반응은 나쁘지 않았고, 블로그와 다이렉트 메시지를 통해 그림 의뢰(프로필 일러스트, 커플 일러스트, 돌잔치 모바일 카드 일러스트 등)도 조금씩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기 시작하였죠. 몇 달간의 고민 끝에 일러스트 브랜드 네임을 '마롱 마롱'이라고 짓고 일러스트만 모은 포트폴리오 사이트를 별도로 만들었습니다. ('마롱 마롱'이라는 단어는 '생기 있고 맑은 모양의 작은 눈알'이라는 뜻을 가진 의태어인데요, 이쁘고 재미있는 어감을 가진 데다가 제가 그리는 일러스트 속 캐릭터들의 작고 똘똘한 눈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그림에 생기를 불어넣어줄 수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되어 붙여지게 된 이름입니다.) 엽서나 휴대폰 케이스 등을 만들어서 판매도 해보았는데 이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거래하던 인쇄 거래처가 있었기 때문에 우선 스토어팜(스마트 스토어)에서 내 일러스트가 적용된 상품 이미지 및 상품페이지를 만들었고, 그 상세페이지로 주문이 들어오면 제작 주문해서 거래처에서 고객의 집으로 전달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주문이 들어오면 제작해서 배송을 하기 때문에 빠른 배송을 원하시는 고객을 잡을 수는 없었지만 재고가 남는 일은 없으니 꽤 괜찮은 방법이었습니다. (요즘엔 마플 샵같이 굳이 개인 쇼핑몰을 열지 않아도 판매할 상품을 선택하여 상품에 들어갈 디자인을 올리면 판매, 제작, 배송을 그쪽에서 알아서 해주고 수수료를 제외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곳이 많으니 판매의 경로는 더 수월해지긴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점점 마롱마롱이라는 이름에 애착이 가자 다른 이름을 사용했던 디자인 홈페이지를 마롱마롱 일러스트 홈페이지에 통합하여 지금과 같이 함께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호주에서 이것저것 경험해 보면서 저와 남자친구는 더 강해졌고, 저는 다시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전되었습니다. 그렇게 호주 워홀 7개월째, 중국으로 부터 남자 친구에게 보낸 한 이메일이 도착했습니다. 

 

 

- 3부에서 계속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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